우와! 영화 기생충에서 본 장면이네요! 백인제가옥
가회동에 위치한 백인제가옥은 일반인의 눈으로도 건축학적 가치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집이 빛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엄청난 현대사를 고스란히 품었기 때문이다.
서랍닷컴(seoraab)과 함께 백년한옥, 백인제가옥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자.
우와! 영화 기생충에서 본 장면이네요! 백인제가옥
백인제가옥의 위풍당당한 안채. 안주인의 방을 중심으로 할머니방과 며느리방으로 구분되었다.
" 4명의 주인을 거친 대하드라마의 주인공 같은 한옥 "
전형적인 양반 동네 북촌 가회동에 자리 잡은 백인제가옥은 지은지 1백 년이 되었다. 이 아름다운 한옥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 집을 거쳐 간 집주인들의 면면을 잠깐 살펴봐야 하겠다.
대한민국 격동기의 인텔리이자 트렌드셰터였던 이 집의 주인, 백인제 박사.
1913년 이 집을 건립한 사람은 한성은행 전무였던 금융가 한상룡이었다. 거부(巨富)였던 그는 당시 경성에서 처음으로 만주흑송을 들여와 건축자재로 쓰는 등 트렌디함을 뽐냈다. 15년 후 이 집은 언론인 최선익에게 넘어갔고, 세 번째 주인은 의학박사 백인제였다. 경성의전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 의과대학교수로 프랑스, 독일, 미국에 유학한 백인제 박사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인텔리전트였다. 서울의사회 초대회장을 지낸 거물인 그는 사재를 털어 1940년대 초반 개인적으로 백외과를 설립했는데 그것이 지금 중구에 있는 백병원의 시초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자, 그의 부인 최경진이 이 집을 지켰고, 2009년 서울시로 소유권을 이전하게 된다. 4명의 주인을 거치는 동안 백인제 일가가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오래 살았기에 이 곳은 ‘백인제 가옥’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 격조를 품으며 근대의 효율성을 살린 백인제가옥 "
쟁쟁한 집주인들 덕에 이 저택은 국내 고관대작은 물론 외국 귀빈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석유왕 록펠러까지 한국을 잠시 방문했을 때 이 집을 방문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양반 가옥의 매력에 빠졌다고 하니 ‘국가대표급 가옥’의 위용을 자랑한 셈이다.
웬만한 건물 규모의 대문간채는 집주인의 위세를 대변한다. 4명의 주인을 거친 이 집은 이제 서울특별시에서 관리한다.
백인제가옥의 높다란 대문간채는 조선 사대 부가의 솟을대문 형식을 그대로 채용했으며, 전통한옥의 격조 높은 대문을 연상시킨다. 이 대문간채에는 제법 규모 있는 행랑채가 있는데 한창 시절에는 일하는 사람만 17명이었다고 하니 살림규모를 짐작게 한다. 지금은 입장하기 전 영상실이 있어 가옥의 역사와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좌)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2층 건축물. (우) 사교와 중요회담의 장소였던 백인제가옥 사랑채.
특히 백인제가옥이 다른 상류주택과 구별되는 점은 격조와 더불어 근대의 효율성을 적절히 살린 것이다. 사랑채와 안채를 엄격히 구분했던 우리의 전통 한옥과는 달리 두 공간이 복도로 연결되어 있어 신발을 신지 않아도 두 건물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전통한옥에 익숙한 관람객은 그 연결이 익숙하지 않아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에 오는 웃지 못할 일이 생긴다. 일본식 복도와 다다미방, 그리고 붉은 벽돌과 유리 창호를 많이 사용했으며 안채의 일부가 2층으로 지어진 것은 건축 당시의 시대상을 살린 것이다.
" 위풍당당 안방, 편안함을 반영한 할머니방,
프라이빗한 며느리방까지 3대가 공존하는 안채 "
안방은 집안의 안주인이 거처하는 장소로 한옥 중에 가장 안쪽에 자리 잡는다. 집안 외의 외부 남자는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다.
안방은 가장 어른이 아닌 권력의 실세인 안주인이 차지한다.
고급스러운 건축기술의 하나인 부채모양의 서까래.
(좌) 신식물건인 괘종시계도 한옥과 어우러져 집안 분위기의 럭셔리함을 더한다.
(우) 안채의 리빙룸격인 대청. 고급스러운 가구와 패브릭이 눈에 띈다.
안채 정중앙에는 안방과 대청이, 그 오른쪽에는 할머니방 왼쪽에는 며느리방이 있다. 안방 물림이라는 설명이 있는데,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곳간 열쇠를 물려줄 때 방 위치도 바꾸는데 이것을 안방 물림이라고 한다. 안방의 뒤편에는 윗방이라는 작은방이 구분되었는데, 이곳은 안주인의 수납가구와 기타 귀중품이 자리 잡고 있고 옷을 갈아입거나 단장을 하는 용도였으니 요즘으로 치면 안방의 '파우더룸'인 셈이다.
(좌) 며느리방의 미니 층이라할 벽장. 이불 등을 보관하거나, 여름철에는 낮잠 장소로도 애용되었다.
(우) 안채에서 내다본 정원.
할머니방은 며느리에게 권력을 이양한 할머니가 기거하는 방으로 ㄱ자로 꺾인 안채의 끝에 있다.
문 앞에는 별도의 작은 대청이 있어 할머니의 휴식공간을 할애했다. 마당을 향한 넓은 문은 연로한 노인이 문을 열어 바깥 구경을 할 수 있는 창문의 역할을 한다. 정식 출입문은 그 옆으로 나 있다. 며느리방은 비교적 프라이빗함을 자랑한다. 견고한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규모는 작지만 아늑한 방이 마련되어 있고, 그 뒤에는 창이 있는 넓은 벽장이 있다. 방안 공기보다 서늘해서 수납의 용도로 쓰이거나, 여름철에는 아기들의 낮잠 장소로 쓰였다고 한다. 각 방과 대청에는 보료와 등받이, 서안으로 꾸며진 호스트의 자리가 꾸며져 있어 고급스러운 한식 스타일이지만 대청에는 괘종시계, 콘솔 등이 함께 있어 서양식 트렌드도 혼재하고 있다.
" 수많은 비즈니스와 파티가 거쳐간 사랑채 "
안채에서 사랑채를 연결하는 긴 툇마루를 걸으면 가슴이 떨리는 이유는 영화 ‘암살’의 한 장면이 떠오르기 때문일까?
아들이 쓰던 작은 사랑방을 거쳐 코너를 돌면 집주인이 쓰는 본 사랑방과 서양식 거실로 꾸민 대청이 연결된 이 집의 메인 공간이 나온다.
서울에 사는 대표적인 양반의 저택이라는 이라는 설명에 호기심을 보이는 외국인 관광객들.
(좌) 작은 사랑의 감각적인 방꾸밈.
(우) 영화 암살의 배경이 되었던 사랑채 거실. 하정우와 전지현이 등장한 장면에서 이 거실은 또하나의 주인공이었다.
영화 ‘암살’에서 안옥윤(전지현)과 하와이 피스톨(하정우)이 예비신랑 가와구치를 사이에 두고 차를 마시며 옥신각신하던 장면을 본 사람이라면 주인공들 만큼이나 그 집의 정경에 관심을 가져 봤을 것이다. 세트가 아닌 실제 집이며, 어떠한 장치 없이 원래 있던 그대로 영화에서 쓴 셈이다. 당시에도 귀한 물건임에 틀림없었던 축음기는 위풍당당하게 사랑채의 가장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
이 건물의 고급스러움은 몇 가지로 압축이 되는데, 천정에 부챗살 모양의 서까래,
복도를 연결하는 유리 창호, 그리고 바로 분합문입니다.
"
앞서가는 인테리어 기법을 보여주는 분합문. 연회를 자주 열었던 당시 거실을 넓게 써서 많은 손님을 수용하고 싶어했던 주인의 마음이 엿보인다.
문화해설사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보니 사랑방과 대청을 분리하는 문이 우리가 아는 여닫이문이 아닌 한 짝씩 떼어내서 천정에 고정하는 분합문이었다. 연회나 모임에서 장소를 좀 더 넓게 쓰려는 용도로 궁궐이나 최상류층에서나 썼다는 인테리어 장치다. 사랑에서 보이는 통창으로 정원이 한눈에 들어오고, 조금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남산타워가 정면으로 보인다. 이 집의 사랑채는 다른 집보다 조금 지대가 높아서, 말 그대로 그 시대 경성 최고의 뷰를 자랑하는 명당이었던 것이다.
" 시대상을 반영한 최고의 안전장치, 방공호
별당아씨 대신 주인어른이 애용한 별당채 "
백인제가옥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소는 대문 앞에 큰 규모로 판 방공호다. 철제 뚜껑을 열고 사람이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보이자 누군가 소리쳤다.
시대상을 반영해주는, 웃지 못할 흔적 방공호. 백인제 박사는 주로 술저장고로 사용했다고 한다.
"우와! 영화 기생충에서 본 장면이네요!" 영화 '기생충'에서 주인공이 숨어지내던 방공호가 그것도 옛 한옥에 있다니, 상상도 못한 조합이다. 이 기묘한 조합의 원인은 당시 시대적인 분위기에서 찾을 수 있다. 한반도는 물론, 아시아 전체가 혼란기였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집주인은 방공호를 조성했는데 전문가들은 이를 통해 밖으로 탈출하는 길이 있지 않았을까 유추한다고 한다. 정작 집주인 백인제 박사는 사냥과 연회를 즐겨, 방공호를 술 저장고로 활용했다고 하니 일종의 와인셀러 역할을 한 셈이다. 이 방공호가 딱 한 번 대피용으로 사용된 것은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 30여 명이 침투한 일명 ‘김신조 사건’이라고 한다.
(좌) 좀처럼 찾을 수 없는 신비스러운 별당채. (우) 붉은 벽돌을 많이 사용한 점은 고급 건축자재를 많이 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좌) 별당아씨보다는 집주인이 사업구상을 하는 개인공간으로 사용한 별당채.
(우) 누구도 범접할 수 없었던 조용한 공간이었다고 한다.
사극 드라마처럼 이집 별당채에는 별당아씨가 살고 있었을까? 백인제가옥의 경우 사랑채가 수많은 내방객들이 드나드는 비즈니스 공간이었다면, 별당채는 지극히 개인의 공간이었다. 일단 드나드는 길이 울창한 수목으로 가려져 있어 집 구조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단번에 찾기가 쉽지 않다. 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별당채는 우뚝 선 정자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높은 건물이 없었던 당시 안에 앉아 창밖을 보면 그 당시 경성 시내가 한눈에 다 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았다고 한다. 집주인이 이곳에 앉아 연구나 개인적인 상념에 몰두했는데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공간이었던 셈이다. 이렇듯 건축학적인 가치는 물론, 옛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백인제 가옥. 지금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시간의 흐름을 품고 반짝이고 있다.
백인제 가옥은 2015년부터 일반인들에게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자유관람의 경우 외부만, 안내원 해설관람을 예약할 경우 실내까지 관람할 수 있다.
안채의 건물에 새겨진 삼태극문양은 상서로움을 의미한다고 한다.
-관람시간: 화~일요일 오전 9시~오후 6시
-해설관람예약: 서울시 공공서비스 예약 웹사이트
-문의: 02-724-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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