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 탐방] 백년 전 셀럽, 소설가 한무숙문학관
그는 소설가이자, 화가이자, 서예가였다. 민간외교관이자, 요리연구가이자, 파티플래너이기도 했다.
1백년전 태어난 위대한 셀럽, 소설가 한무숙의 오래된 집-‘향정헌’에 대해 알아보자.
[고택 탐방] 백년 전 셀럽, 소설가 한무숙문학관
소설가 한무숙 문학관, ‘향정헌’은 한무숙의 호인 ‘향정’에서 비롯되었다.
전형적인 서울 양반가 한옥, 1백년이 되다
종로구 명륜동 1가 33번지 100호. 종로08 마을버스 정류장과 채 열 걸음이 되지 않는 곳에 숨은듯이 자리잡은 잘생긴 한옥이 한채 있다.
견고한 대문과 우아한 건물은 드라마 촬영지로 일부러 지어놓은 집이 아닐까 싶게 빼어나다.
명륜동 골목을 꿋꿋이 지키고 있는 향정헌. 집앞 앵두밭에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검색창에 한무숙문학관이라고 치면 찾을 수 있는 이 고택의 정식 명칭은 ‘향정헌’으로 ‘역사는 흐른다', '만남' 등을 집필한 소설가 향정 한무숙이 1953년부터 1993년까지 40년간 살았던 곳이다. 20세기 초 장안의 대목 심목수라는 장인이 지은 한옥으로 이미 백 살이 넘었다고 한다. 서울미래유산, 문학관이라는 타이틀과는 무관하게 이 곳의 문턱은 그리 높지 않다. 명륜동의 정다운 이웃집으로 곧잘 대문이 열려 있다.
잉어가 헤엄치는 연못과 빼곡한 화초로 낭만을 더하는 정원은 사계절 분위기를 달리한다.
대문에 들어서면 잘 가꾼 정원을 중심으로 정면에는 사랑채로, 왼쪽은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현재, 문학관 관장을 맡고 있는 장남부부가 거주하고 있는 살림집이다. 장남인 김호기 관장은 어린 시절부터 한번도 본집 식구들끼리 살아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사랑채 칸칸이 나눈 방에는 본식구 외에도 십여명의 객식구들이 북적였다. 친척은 물론 후배 문인이며, 서울대 문리대에 사는 문학청년도 있었으니 그 중에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나 천상병시인도 있었다. 한무숙문학관의 다양한 사업을 기획, 진행하는 나윤지 학예사는 한무숙 선생님의 생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통의동에서 태어난 한무숙선생님이 시집도 서울토박이 명문가에 맏며느리로 오신 거예요. 여기서5남매의 어머니이자 안주인으로 사시다 1993년 돌아가셨어요. 은행가였던 부군 김진흥님께서 한무숙재단을 설립하고 작가가 살던 집을 공개하는 사업을 시작하신 거죠.”
안채였던 건물은 작가의 장남인 김호기 한무숙문학관장 부부가 거주하고 있다.
해외에서 오래 근무한 그들은 아파트의 안락함 대신 조부모와 부모가 살았던 공간을 추억하는 노년을 택했다.
“관람객들은 문학에 관심있는 분들도 있지만, 어르신 중에는 방송이나 잡지에 나온 한무숙선생님을 추억하며 방문하는 경우도 많아요. 작품은 잘 몰라도 잡지에서 집안 인테리어나 손님 초대 요리 소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도 하고, 부부가 TV 퀴즈프로그램이나 토크쇼에 출연한 것을 기억하는 분도 많죠. ”
그렇다. 이 집에 살던 사람을 설명하자면 그 당시 말로는 명사, 지금 말로는 셀럽이었던 것이다.
소설가, 화가, 주부…100년 전 N잡러 한무숙의 서재
한옥인 안채와 양옥인 2층을 연결하는 나선형 계단.
문학관 관람이자 집구경은 크게 두 파트로 나눠진다. 안채 뒷문을 열면 2층으로 통하는 나선형 계단이 나온다. 한옥을 훼손하지않고 별관처럼 양식건물 3층을 올렸다. 그 건물 2층에는 작가의 집필실을 재현한 방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작가가 생전에 썼던 가구와 소품이 그대로 있다.
방금 전 작가가 앉았었던 것이 아닐까 느껴지는 공간, 집필실.
가장 작가와 교감할 수 있는 장소라 할 수 있다. 좌식탁자와 책꽂이, 아끼던 장서는 물론 반들반들한 안경, 손때 묻은 만년필, 다양한 고급 잉크병까지 지금도 어느 매체에 연재를 하는 현역 문인처럼 고스란히 놓여있다. 정리정돈 스타일을 보니 작가는 문구 애호가임에 틀림없다. 그는 여학교 시절 동아일보 연재 소설에 삽화를 그렸을만큼 촉망받는 화가지망생이었으며, 말년에는 부부서화전을 두번이나 열 정도로 의욕있는 서예가였다. 이러한 활동을 보여주듯 탁자에는 서예용구들도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어 보는 사람에게 흥미를 끈다. 역시 손을 많이 타서 반질반질한 일본어 사전을 싼 포장지나, 탁자 안쪽에 자리잡은 비단보료와 쿠션의 꽃무늬를 보니 갑자기 가슴이 설렌다. 시간을 관통하여 작가의 ‘소녀소녀함’이 그대로 전해져서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집필실 맞은편 공간은 한무숙문학재단에서 지원하는 상주작가의 집필실이다.
세심함과 소박함이 느껴지는 작가의 애장품들.
“작가님은 결혼하고 화가의 꿈을 접었는데, 식구가 많아서 시집살이가 만만치 않아서 자연히 그리 되었대요. 자료에 보면 도와주는 고용인들이 있어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가사에서 풀려나기가 어려웠다고 해요. 어느 날, 신문에 난 소설공모를 보고, 벽에 원고지를 대고 밤새워 소설을 써서 응모하셨대요. 그게 작가 인생의 시작이었죠.”
그는 작가이자 라이프스타일리스트기도 했다. 직접 제작한 그릇, 쿠션, 그리고 수저집.
대하소설 <역사는 흐른다> 출판기념회 기념사 원고.
나윤지 학예사는 나선형 층계로 이어진 3층공간으로 안내한다. 3층은 작가의 연보와 육필원고, 집필을 위해 수집한 자료 등 다양한 아카이브로 정리된 공간이다. 1948년 해방 후 문단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대하소설 ‘역사는 흐른다’ 원고의 필체는 치열했던 작가의 심경을 그대로 반영한듯 생생했다. 집필 틈틈히 직접 그림을 그려 구운 접시가 여러 점 눈에 띈다. 뿐인가, 십대 때 혼수로 틈틈이 준비했다는 수저집, 그리고 평소 틈틈이 자수를 놓아 완성했다는 비단 쿠션의 안목은 놀랍다. 재주 많은 라이프스타일리스트였던 작가의 인생을 그대로 설명해준다.
가와바타야스나리와 펄벅이 다녀간 거실
크고 작은 문단모임과 연회가 잦았기에 국내 여류 문인들은 대부분 다녀간 향정헌 응접실.
해외문인들은 물론 각국 대사부인들도 방문해서 한옥의 아름다움을 실감하고 돌아갔다.
안채와 사랑이 이어지는 툇마루를 종종 걸음쳐 빛이 잘 드는 남방향의 대청마루에 들어서면 제1전시실이다.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이사로 활동하던 작가는 창의적인 행사 기획자이자, 위대한 파티플래너기도 했다. 이 곳은 1950년대부터 본인의 출판기념회, 5남매의 하우스콘서트, 국내외 문인들을 초청하여 크고 작은 연회를 벌인 장소였으니 요즘 유행하는 홈파티의 오리진이기도 한 셈이다. 현재는 육필원고, 저서, 국내외 저명 인사 친지 편지, 각 훈장, 생활용품 등 주요 물품이 전시되어 있다.
운보 김기창 화백의 작품. 문인뿐만 아니라 각계 예술가들과도 긴밀히 교류를 해서 다양한 작품을 선물로 받았다.
작가는 시대를 앞서간 파티플래너기도 했다. 파티와 티타임에 적절한 기물을 사용해서 테이블의 품격을 높였다.
응접실 탁자에 놓인 그릇은 작가가 생전에 아낀 물건.
연결된 공간은 화려한 양식 응접실로 개조한 2전시실로 ‘대지’의 저자 펄벅, ‘설국’의 저자 카와바타야스나리도 방문해서 화제가 되었다. 작가가 직접 쓰던 화각장, 자개문양 탁자, 외국 귀빈들에게 선물 받은 찻잔 등이 그대로 전시되어 화려함을 더한다. 럭셔리한 인테리어만큼이나 소장품도 대단하다. 김기창 화백의 그림, 서정주 시인의 글이 있는 족자, 오세창 서예가의 현판 등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불케할 작품들이 수십점 빽빽하게 걸려있다. 이것이 작정하고 모은 컬렉션이 아니라 모두 해당 작가들과 오랜 교류 끝에 우정의 증표로 받은 것이라니 놀랍다.
향정헌의 물건들은 집주인의 성품을 대변한다. 다양한 소품이 저마다 제자리를 지키며 정갈한 멋을 뽐내고 있었다.
“어머님이요? 1분1초도 쉬지 않는 분이셨죠. 요즘말로 워킹맘이셨고 식구들이나 드나드는 사람이 그렇게 많아도 늘 살림은 알뜰하고 집안은 반들반들했어요. 정원도 잘 가꾸셨고, 가끔 중국집에서 자장면 시켜먹으면 나무젓가락을 안버리고 모아두셨어요. 매일 아침 동네 산책할 때마다 젓가락 들고나가서 오물을 주워 버리는 데 쓰셨죠.” 잉어가 헤엄치는 연못가에 서서 큰며느리인 김강옥씨가 추억하는 작가의 생전 모습이다. 가을을 맞아 다양한 전시와 행사로 분주한 한무숙문학관의 문턱은 사실 그리 높지 않다. 향정헌 사람들은 언제나 방문을 환영한다. 사전예약하면, 일요일과 법정공휴일을 제외한 오전 10시~오후 5시 누구나 관람할 수 있다.
문의. 02-762-3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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